2026.06.28 주일설교 l "주가 아시는 자" 나훔 1:1~8

이종명 0 519

 2026.06.28 주일설교 l "주가 아시는 자" 나훔 1:1~8ㅣ설교:장귀삼 담임목사 

 

주가 아시는 자

나훔 1:1-8

1.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요나서와 나훔서에는 니느웨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니느웨가 어떤 도시이길래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었을까요? 앗수르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고 니느웨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고고학의 발달로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여리고를 포함한 성경의 도시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19세기에 발굴되면서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니느웨를 통해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사건이 되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의 수도로 현재는 이라크 북부 모술 지역에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도서관을 세우기도 한 니느웨는 12Km-13Km크기의 매우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여러 민족들을 괴롭히고 자기들끼리도 서로 죽이는 악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서 아악한 성읍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바벨론과 메대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멸망당한 니느웨는 홍수로 인해서 그 자취가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셨을까요? 요나 4:10-11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니느웨를 긍휼히 여긴 이유는 그들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야다’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야다’는 부부만이 가지는 친밀감입니다. 수건과 대야를 마치고 돌아와서 공항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부부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합니다. ‘야다’는 살면서 함께 많은 문제를 풀어가면서 얻은 지식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이 쌓여지게 됩니다. 


명철한 자는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구합니다.(잠언 18:15)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쓴 재임스 패커의 말입니다. 지식에는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지식’이 있습니다. 먼저 호세아 6장 6절에 보면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니느웨 사람들을 위해서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성읍 사람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요나 4:1-3 1.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야다’가 니느웨에게는 ‘구원’이 되고 요나에게는 ‘절망’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역전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번 수건과 대야에서 귀한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하셔서 온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교회 권사님이 말씀을 듣다가 성령이 임하셔서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권사님이 은사를 받자 성도들이 찾아가서 기도도 받고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이 일로 교회에 문제가 생기자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따로 나가서 사역을 하시도록 조용히 권면을 했습니다. 권사님도 말씀에 순종하고 따로 나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권사님을 따라서 성도들도 따라갔습니다만 일 년 만에 모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뜻 모를 은사와 사역은 길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역을 해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다섯 가지 영역인 예배, 교육, 구제, 선교, 봉사는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셨지만, 사실은 선지자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나 4:10-11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자신이 받은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얼마 못 가서 구원의 지식을 버렸습니다. 나훔 선지자도 요나와 같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나훔 1:2-3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러나 나훔에게 주신 말씀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박넝쿨로 긍휼을 가르쳐 주시더니, 나훔에게는 범람하는 물로 심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6.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선지자의 예언대로 니느웨는 큰 홍수로 인해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선지서를 통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님이 아시는 지식’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시는 지식’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시기 때문에 이 시간 나를 부르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얻게 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 지식이 없어서 영적인 번 아웃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번 아웃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아시는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과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시편 139:1-6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위와 나의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찾으시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2.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반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7.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진리되신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야고보서 1:21-26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청년들이 좋아하는 “공감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동정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공감이라는 말은 없기 때문에, 이 찬양이 신학적으로 맞느냐 틀리냐를 놓고 목사님들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 시대 언어로 쓰인 성경을 우리 시대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입니다. 동정이라는 말 Sympathy는 내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외에는 우리 모두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감이라는 말 Empathy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시지만 처지가 같은 우리는 상대방을 공감할 때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이 공감 받기 원하는것은 주님께서 나를 알아주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을 향해서 “기도해라! 하지 말라”라는 정답보다, 그들의 현실과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부어 주실 질 믿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아시는 주님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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